풍수지리는 크게 형상(形象), 형기(形氣), 이기(理氣) 세 가지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각각을 전적으로 “아날로그식이다, 디지털식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용어의 사용은 개념에 대하여 정합성(整合性)을 지녀야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수히 많은 경전을 교의(敎義)와 모순되지 않게 해석하기 위하여 이른바 ‘교상판석(敎相判釋)’을 합니다.
예를 들어, 『반야경』은 씨앗을 심는 것이고 『능엄경』은 김을 매고 가꾸는 것이며, 『법화경』은 수확하는 것이요, 『열반경』은 이삭을 줍는 것이라고 비유하면서 경전과 설법의 형식, 시기 등을 분류하여 체계화합니다.
물론 교상판석은 믿고 따르는 경전(소의경전)에 따라 다양하기에 당연히 여러 종파가 성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장풍득수(藏風得水)에 관하여 많은 문헌이 있고 그 속에는 형상론, 형기론, 이기론 등으로 독립하거나
때로는 섞여서 지금까지 전해옵니다.
저는 지금 이 세 가지의 풍수이론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형상(形象)으로 보는 풍수에도 디지털의 잣대가 필요하고 이기(理氣)풍수에도 아날로그의 시선이 머물러야 합니다.
1. 아날로그와 디지털
직관적으로는 모두 알고있는 용어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개념을 정리하겠습니다.
어떠한 정보를 ‘연속적인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것을 아날로그 방식이라고 하고,
‘숫자값’으로 처리하는 것을 디지털 방식이라고 합니다.
‘연속적인 물리량’은 표현하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입니다.
색깔을 예로 들면, 파랗다, 새파랗다, 푸르다....... 등등 많고 모호하지만
이것을 디지털로 표현하여 rgb 값으로 나타내면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시골에서 서울로 가고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와서 어디쯤이냐고 물었을 때,
“반쯤 왔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날로그식이고 서울기점 몇 킬로라고 말하는 것이 디지털식입니다.
과연 디지털은 정확하고 편리하며 아날로그는 흐리멍덩하고 불편할까요?
그렇다면 비용도 저렴하며 깨끗하고 편리한 디지털 음원을 멀리하고
아직도 사람들이 LP 음반을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디지털 방식이 비록 엄청나게 발전하였음에도 아직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온전하게 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리정보를 디지털로 바꿀 때 0과 1로 된 이진법으로 옮깁니다.
더 정확하게 음원을 재생하려면 0과 1로 된 숫자조합을 계속 세분해서 0에서 다시 0과 1, 1에서 다시 0과 1.......
이런 식으로 늘어난 디지털 정보는 용량이 늘어납니다.(그래서 압축기술이 개발되고는 있습니다.)
아무리 0과 1의 조합이 늘어나도 완벽한 재생은 불가능하고 청각이 우수한 이들은 그 차이를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미분은 미분일 뿐 결코 적분이 아닙니다.
특정한 소리와 모습을 나만의 감각으로써 듣고 느끼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아날로그 방식은 안성맞춤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와 모습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거나 저장하려면
딱히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도 또 다른 어떤 방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제3자가 구현했을 때엔 반드시 동일하게 재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풍수와 관련하여 대입(代入)하면,
① 지형을 정확하게 보기위해서는 아날로그 방식이어야 합니다.
② 그 지형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려면 디지털 방식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통의 형상풍수가(形象風水家)들이 지형을 정확하게 볼 수 있을까요?
꾀꼬리의 고음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것이 꾀꼬리 소리다.”라고 말할 수 없듯이
도안(道眼), 법안(法眼), 혜안(慧眼)이 없는 사람들이 지형에 접근하는 아날로그 방식은 미덥지 않습니다.
또한 이기풍수가(理氣風水家)들의 상수(象數)가 온전하게 지형을 표현하고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은
마치 아무리 뛰어난 압축기술로써 촘촘하게 0과 1로 구성한 디지털음원일지언정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상풍수는 도력(道力)이 있어야 하고, 이기풍수는 끝없는 구궁분할이 있어야 합니다.
2. 형상(形象)으로 보는 풍수
“풍수보따리는 거짓말보따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풍수와 지관(地官)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원인의 8, 9할은 아마도 형상론 풍수에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산과 강, 기타 지형을 보고 “저 산은 신선이 바둑 두는 형상이고.......”라면서
‘오선위기혈’이 이러하고 저러하고 등등....... 단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언뜻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조차도 그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데
무정물(無情物)을 족집게로 꼭 집어내듯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른바 오선위기혈의 다섯 존재가 신선인지, 요괴인지 어떻게 알 것이며,
바둑을 두는지 고스톱을 치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숨기고 견강부회하는 짓은 남을 속이기전에 자신부터 속이는 일입니다.
즉 망령된 짓거리이므로 그들의 마음이 바르지 않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학』에 나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욕정기심자(欲正其心者)는 선성기의(先誠其意)하고 욕성기의자(欲誠其意者)는 선치기지(先致其知)하니 치지(致知)는 재격물(在格物)하니라.」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앎을 지극하게 해야 하니,
앎을 지극하게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데 있다.」 라고 해석합니다.
사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형상(形象)으로 풍수를 보는 지관의 생각, 뜻이 아무리 정성스러워지고 싶어도 정성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뭘 알아야 면서기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냥 완장질만 하다가 결국에는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관하여는 입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상대방, 집안, 나라의 길흉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로 위 대학의 말씀에서 정심(正心)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마음이 ‘올바르거나 착한 것’이 아니라
일체 마음에 결(무늬)이 없어야 함을 뜻합니다.
『대학장구』에서는 마음에 분노(분치; 忿懥), 두려움(공구; 恐懼), 좋아함(호요; 好樂), 근심(우환; 憂患)이 없어야
그 마음이 바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상(形象)으로 풍수를 보는 사람의 생각에 이미 성실함이 없으면
지형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분노의 마음, 두려움, 편벽되게 좋아하는 마음, 걱정거리 등으로 채워지고,
이처럼 온갖 잡념으로 가득한 그 마음의 결을 따라서 풍수를 감정하게 됩니다.
두려울 때는 ‘상제봉조혈’이 되었다가 좋아하거나 근심이 생기면 봉황이 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곧 정심(正心)에 의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의 풍수감정을 갖고는 천하사는커녕,
국가, 집안,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에게도 그 감정결과를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형상풍수가(形象風水家) 가운데에서 참된 도력을 갖춘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도안(道眼)은 법안(法眼)이고 혜안(慧眼)입니다. 혜(慧)는 식(識)이 바뀐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으로 사물을 인식합니다.
눈~몸으로 대상을 접하여 인식한 것을 불교유식학에서는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합니다.
가장 앞서서 접촉한다는 뜻으로 ‘앞 전(前)’자를 쓰고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라는 뜻으로 ‘오식(五識)’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알음알이’입니다. 그리고 생각, 즉 분별하는 인식을 ‘의식(意識)’이라고 하며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서 자아의식을 ‘말라識’, 윤회하는 주체가 갖고 있는 것을 ‘아뢰야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식(識)들이 각각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로
바뀌지 않았으면, 그 형상풍수가가 감정하는 대상은 큰 거울처럼 원만하게 다 비춘 결과가 아니며,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서 코끼리라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즉 차별되지 않고 골고루 갖춘(= 평등한) 지혜로써 평가한 것이 아니며,
그 결과 그 지형이 갖고 있는 내면의 오묘함을 관(觀) 하지도 못한 것이어서,
그 풍수결과를 갖고서 나, 가정, 국가, 세계의 길흉에 대하여 그 무언가를 해낼 수(成所作)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드름 떨면서 도사흉내를 내거나 큰 선사처럼 “할! 할!”하는 몹쓸 승려들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심지어는 생이지지(生而知之), 즉 태어나면서 알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서슴지 않는 자들도 꽤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가려내는 방법은 너무나 쉽습니다.
축지법을 쓰니 못쓰니, 귀신을 본다, 안본다의 차원이 그릇된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까지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여름철에 땀 뻘뻘 흘리며 허덕이고 있는지, 겨울철에 두꺼운 외투 걸치고 아랫목이나 차지하고 있는지,
관절염, 당뇨, 기타 갖가지 병환에 시달리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어떤 요망한 자칭 도사, 승려는 중생의 죄를 대속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병마에 시달린다고 둘러댑니다.
그렇다고 인정할지라도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내거나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든다면
이 역시 도에 통하거나 견성한 자가 아닙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치를 깨우쳤으면 내 몸뚱이 하나에 집착하는 신견(身見)에서는 이미 벗어났어야 합니다.
결국, 형상으로 풍수를 볼 수는 있겠지만 그 풍수가들의 지혜가 미더운 수준에 이르렀는지
그들 스스로 커밍아웃을 하고, 그들을 받드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지식이 지혜로 바뀌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스갯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옷을 벗겨 고추가 몸 밖으로 보이면 그들이 하는 형상풍수의 평가는 듣지 말아야 합니다.
수다원(須陀洹)만 되어도 생식기는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기풍수가들을 향하여 병신이 육갑 짚듯이 손가락 꼼지락하지 말라면서 타이르기 위해서는
이처럼 혜안이 열린 자의 아날로그 풍수라야 가능합니다.
3. 형기풍수(形氣風水)
이른바 용(龍), 혈(穴), 사(砂), 수(水)라고 하는 지리사과(地理四科)의 이론으로써
지형상의 형세를 보고, 명당이라는 혈처(穴處) 자리를 찾는 것이 형기풍수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형기풍수이론을 아날로그 방식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앞에서의 형상풍수와 비교하면 디지털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많지만 핵심은 향(向)에 있습니다.
향(向)을 나타내는 방위는 비록 구체적으로 주천도수가 아닐지라도
24방위이든, 12방위이든, 아니면 그냥 동서남북으로만 나눌지라도 적어도 90도의 구분선을 전제로 합니다.
‘디지털’은 문자 그대로 숫자를 의미하지만 그 숫자를 얼마나 세분하는가에 따라
디지털을 사용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정보의 질과 양이 달라집니다.
용(龍)에 관하여,
어디쯤을 태조산(太祖山), 소조산(小祖山), 부모산(父母山)이라고 할까요?
백두산이 태조산인가요? 한라산이 태조산인가요?
개장(開障)은 얼마큼 옆으로 벌어져야 하고 과협(過峽)은 얼마큼 가늘어야 할까요?
출맥(出脈)은 보통 몇 절 정도를 이루어야 하고 어느 정도 반복하여야 박환(剝煥)일까요?
어느 산등성이가 입수(入首)일까요?
안산(案山)은 혈 앞에서 어느 정도 가까운 것이며, 조산(朝山)은 얼마큼 멀리 보여야 할까요?
혈(穴)에 관하여,
생기(生氣)가 어느 정도 응집하여야 혈처라고 하고
어느 정도의 모양이어야 와혈(窩穴), 돌혈(突穴), 유혈(乳穴), 겸혈(鉗穴)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사(砂)에 관하여,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안산, 기타 조형물은 어디에 어떤 방향으로 있어야 할까요?
수(水)에 관하여,
득수(得水), 거수(去水) 또는 파수(破水), 취수(取水)는 무엇을 얼마큼 어떻게 인정할까요?
위에서 말한 형기풍수의 여러 기본용어들을 그냥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인지하고 감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디지털 정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어쩌면 형기풍수는 형상풍수보다 더 혹세무민할 만큼 위험합니다.
두루뭉술한 몇 마디 말쯤이야 웃으면서 두루뭉술하게 여기면 그만이지만
다소 정치(精緻)하게 보이는 용어 속에 감춰 둔 거짓과 무지(無知)는 민초들의 호주머니를 털뿐만 아니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혹독한 정치처럼 영혼마저 갉아 먹습니다.
그러나 산수(山水)의 거리를 가늠하고 나경으로 방위를 측정하는 것이 디지털 풍수의 전부가 아닙니다.
‘디지털’ 풍수의 목적은 끝없는 미분을 통하여 ‘아날로그’ 풍수를 구현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변수와, 동일한 지형물이라도 지형물 자체와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시공간의 율려(律呂)를
함께 반영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풍수적으로 표현하면 이기풍수가 될 것이고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파동역학입니다.
4. 이기풍수(理氣風水)
여기에서는 삼합풍수, 삼원풍수....... 이런 구분을 하지 않고 그냥 ‘율려풍수’라고 통칭하겠습니다. 율려는 파동입니다.
음택에 계시는 조상님의 유골이 고유의 파동을 갖고서 진동하고,
용, 혈, 사, 수, 기타 풍수의 모든 요소들 또한 각각의 고유의 진동수를 지닌 채
서로서로 파장과 진폭을 보강하거나 상쇄시키며 간섭합니다.
파동은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위로 퍼져 나가거나 소멸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파동에 관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은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어릴 때 부르던 위 동요처럼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퍼져나갑니다.
그러나 ‘물’은 이동하지 않고 다만 위아래로 출렁거릴 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꼭 기억하십시요.
연못에 돌이 퐁당하고 들어간 후 저 쪽까지 물결이 퍼진다는 것은 에너지의 전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은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파동은 ‘에너지는 갖고 있지만 질량도, 부피도 없습니다.’
모든 물체는 자신만의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진동수와 똑같은 진동수를 지닌 파동과는
간섭현상(干涉現象)이 일어납니다.
파동과 파동은 이러한 간섭현상으로 인하여 파동의 마루와 골이 일치하면 진폭이 0 으로 되어
소멸하기도 하고,
파장과 진폭이 서로 같아서 마루와 마루, 골과 골이 일치하면 파동의 진폭은 2배, 세기는 4배가 되어
증폭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증폭될 경우를 공명현상(共鳴現象)이라고 합니다.
4.1 풍수와 공명현상(共鳴現象)
저 멀리 태조산에는 분명 진동수가 각기 다른 수많은 파동이 존재합니다.
이 파동은 여러 갈래의 소조산으로 전달될 것이고,
소조산에서는 자체적으로 지닌 각각의 파동들이 태조산으로부터 퍼져온 파동과 섞여
간섭작용에 의하여 소멸되거나 공명작용에 의해 증폭될 것입니다.
증폭된 파동은 또다시 부모산, 주산 등으로 퍼져 위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혈처까지 도달하거나 소멸됩니다.
비록 태조산이 백두산으로 동일할지라도 각각의 혈처까지 퍼져 오는 과정에서
파동의 간섭작용에 의하여 증폭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증폭에 관여하는 풍수요소가 바로 용, 혈, 사, 수입니다. 그러면 향(向)은 무슨 역할을 할까요?
동기감응(同氣感應)이 향(向)에 달려있습니다.
즉, 혈처에 증폭되어 도달한 풍수적으로 유의미(有意味)한 파동(이것이 氣라고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 후손에게 전달되도록 파동의 진동수를 조절하는 역할은 향(向)이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용, 혈, 사, 수가 좋은 명당이라도
후손과 공명할 수 있는 향(向)이 아니면 동기감응(同氣感應)은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4.2 동기감응(同氣感應)과 운(運), 향(向)
기(氣)와 기(氣)가 동기감응하려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파동을 증폭하는 공명현상(共鳴現象)이 있어야 하고,
이렇게 공명하는 간섭현상은 파동의 파장과 진폭이 서로 같아서 마루와 마루, 골과 골이 일치해야 합니다.
향(向)에 의하여 ‘일치’하면 그때를 ‘운(運)’이라고 하며, 불교용어로 말하면 인(因)이 아니라 연(緣)에 해당합니다.
제가 위에서 엉터리 형상풍수가들을 언급할 때 도력, 혜안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올바른 형상풍수가, 도사, 선사라면 용, 혈, 사, 수 각각의 파동과 그 파동이 공명하고자 하는
다른 용, 혈, 사, 수와의 연(緣)을 만들어 낼 줄 압니다.
기도를 통해서든, 선정에 들어가서든, 기타 갖가지의 다른 술법을 사용해서든
연(緣)을 짓고, 그 연으로써 운(運)이 열리도록 향(向)을 설정합니다.
그러므로 향(向)을 설정할 때는 반드시 운(運)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운(運)이 어떠한 연(緣)을 지을 것인가를 미리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 서로서로 연(緣)이 되는 모든 풍수요소들이 공명하도록 특별한 간섭현상까지 일으킬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이기풍수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공풍수입니다.
지금 이글은 풍수만 논하고 있으므로
연(緣)을 짓는 방법으로서의 기도, 선정, 주문, 부적 등의 술법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이기풍수, 현공풍수만 갖고서 동기감응할 연(緣)을 짓는 방법은 당연히 비성반 작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비성반 자체는 정해진 운(運; 예를 들어 8운)에서 24개의 좌향과 하괘, 체괘, 공망이 전부이겠지만,
그 비성반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수동적인 해석에 그치게 됩니다.
이럴 경우 능동적인 동기감응은 애당초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공풍수로써 비성반을 해석한 후엔 그에 따라 형기를 조정하겠지요. 그
러나 그에 앞서 더 중요한 일은 비성반의 구궁을 최대한 분할하는 작업입니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미리 예습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몇 키워드를 말씀드리면,
구궁도(원단반)을 그린 후
중궁을 제외한 8개 방위에 있는 숫자 각각을 또다른 구궁도의 중궁에 넣고(성문결, 자백법처럼) 구궁의 숫자를 채웁니다.
이렇게 하면 9개 궁 각각에 9개의 궁이 연결되어 모두 81개의 궁이 생깁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복하면서 계속 9궁을 늘려갑니다.
이 구궁의 숫자를 꼼꼼히 살피면서 패턴을 발견하고 감탄사가 나와야 합니다.
구궁의 분할은 5와 10으로 진행하고,
어떤 방향으로는 6번째의 구궁이, 어떤 방향으로는 11번째의 구궁이 본래의 구궁(원단반)과 동일하게 숫자가 배치됩니다.
6은 1의 성수(成數)이고, 11은 1에서 9까지 간 숫자가 10을 채운 후 다시 시작하는 숫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일부 선생의 정역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지만
그 정역에 ‘십일귀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양자역학(초끈이론)에서는 이미 우주가 11(4+3+4)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을 세웠고,
어쩌면 십일면관세음보살 또한 11 차원에 두루한 중생 모두의 소리를 듣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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