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자미원(紫微垣) 최고의 명당을 찾았습니다.

범산 2014. 8. 13. 05:52

자미원(紫微垣) 명당을 찾았다.

그간에 수 많은 선사들께서 이곳을 찾으려 얼마나 많은 애를 써왔던가?

당나라 양태진이란 지사가 이곳 자미원을 최초 발견한 후 적어도 당나라 멸망이 907년 이였으니

1100년은 족히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껏 용사되지 않고 오롯 생지로 남아있던 그 땅을 매매등기까지 마쳤다.

혹여 임자가 되기 전 일련의 과정에 동티가 나서 모든게 허사로 될까봐 

이토정선생께서 부내복종 찾으려 100일 기도까지 하셨다던 그 간절했을 소망 이상으로

노심초사 공도 들여었다.

 

많은이는 자미원을  계룡대 인근을 이야기한다.내포지역은 일단 논외로 하겠다.

그러나 그곳은 발상조차 터무니없다는 생각이다.

2대천자지지 남연군묘를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있다.

2대천자 결과물이 이미 나와있어서인지 어떤이의 그 이유에 대한 자화자찬은 거반  

허무개그에 까지 도달했다는 생각도 해봤다.

 

굳이 설심부의 

重重包裏紅蓮辨 穴在花心 紛紛拱衛紫微垣 尊居帝座

-여러겹으로 안쪽을 싸고 있으면 홍련으로 분별하여 혈은 화심에 있고

어지럽도록 자미원이 둘러 호위하는데는 제좌가 존엄히 있다. -

라는 글의 근거로 얼추 자미원 언급도있고 뜻도 내포된 듯하니 그것을 자미원이라고 주장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 글의 논거는 아래 그림에서 처럼 혈은 그 형국의 중심에 있다는 뜻으로 

혈을 찾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아래 그림 146도 자미원 우측설명은 설심부 본래의 뜻을

오기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근거는 위의 본문에 아래의 설명이 덧붙혀 있다.

 

"包裏는 猶言 拱衛也니 辨은 花辨也라.

紫薇垣은 卽 所謂 北辰이 居 其所어든 而 衆星이 拱之者也니라.

此是 喩 穴之 形局이니 不可 妄引 方位,天星之說하여 以 雜之也라.

言 點穴之法하고 又當 看 其穴之形局 何如 若 穴 有 重重包裏면

如 紅蓮之辨者則 穴은 必히 居正中하며 如在 蓮花之心而 不偏也니

若 穴有四而 山이 紛紛拱衛면 猶如 紫薇垣局 衆星이 俱供向者則

穴은 必히 居 尊位하니 如 居 天帝之座 而 不卑也라

如此 形局이면 乃 至美至貴之 局也라."

 "안쪽을 싸다는 것은 둘러 호위하는 것이니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꽃을 분별하 듯 하다.

자미원은 북극성이 많은 별들에 둘러 싸여있는 것과 같은 곳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혈의 형국을 말함이니 함부로 망령되게 방위와 천성을 인용하여 혼잡하게 설명해서는 안된다.

점혈의 법을 말함에 있어,또한 혈의 형국을 살핌에 있어 만약 혈이 중중포리면 연꽃에 비유하여

분변할 수 있으니, 연꽃의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처럼 혈은 반드시 그 중심에 있게 된다.

만약 혈의 사방의 산이 분분하게 둘러 싸고 있으면 자미원국의 많은 별들이 같이 둘러 싸고 있는

것과 같으니 혈은 천제가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존귀한 자리에 거하게 된다.

형국이 이와 같으면 지극히 아름답고 귀한 국이다. "

 

 

 

기왕 하늘 삼원중  자미원이 그 중심이라면 남연군 묘는 천시원이다.

아래 일련의 사진에서 보 듯 방장형은 아니다.

방장형의 태미원은 천자 포정지궁(布政之宮)으로 신하들과 정사(政事)를 펼치는 궁궐의 제왕 거처다. 

조회하고있는 자미원처럼 긴장감은 덜 하겠지만 그 위세가 쉽게 흔들릴 수 없다.

안정된 지존이다.

최근 이장후 중국 주석이 되었다는 시안의 시진핑 선친묘는 가보지는 못했으나 태미원 혈처라고 한다.

백성의 운을 주관하고 하늘의 시장을 의미하는 천시원의 제좌 자리는 시장 바닦에서 백성들에게

제왕의 모습을 잠시 외부에 드려내는 자리로써 특성상 짧은 시간내에 비워지는 자리다.

또한 그곳은 혼잡하고 다들 자신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부를 선택하고 몰두하는 곳이다.

제왕은 관심밖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무관심을 해소하기 위한 그리고 그 어서순하고 혼잡한 곳의 질서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제도가 유지관리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존의 귀한 존재감을 알려야 하는

일련의 부속 행위 즉 여러 정치적 술수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

흥선대원군섭정,고종,순종때 사회상은 임상적으로 천시원의 암시와 이 묘소의 선정과 매우 유사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래는 천시원 관련 사진과 그림들이다.  

 

 

 

중앙의 빨간점이 남연군 묘소이다. 

 

아래는 자미원 관련 그림과 사진들이다.  

 

 

 

 

남연군묘는 위 사진들에서 처럼 자미원과는 형기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래쪽 북두칠성과 위쪽 화개다.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 사실은 잠시 비공개로 하겠다.

아울러 북두칠성은 우리나라에서만 칠성각으로 의미가 크게 부각되어 있지만 서양과 중국에서는

별반 그 의미를 두지 않고있다.

또한 위도 경도 계절차이 관측기술등으로 별자리가 조금씩은 틀리다.

그러함에도 남연군묘는 자미원이 아닌 천시원과 일치함을 확인했으리라 본다

 

이후는 남연군묘소와 관련된 몇가지 이과적 선정들을 정리하겠다.

대지에서 볼 수있는 관창(暢)으로 공읍(拱揖)하는 전조(前朝)가 없고 원진수가 직거로 길며 안산이 없다.

대패 흉이다.

바위는 강한 기운의 빠른 발복을 암시한다.

하지만 입수절의 느러터진 게으름으로 18년이 지난 후 당대 천자를 일궈냈다. 

주산 석문봉이 좌우 옥양봉 가야산 위세에 짖눌러있 듯 위축된 제왕의 땅이다. 

 

 

이곳은 2와 관련해서 몇개의 암시가 있다. 제좌에 2개의 봉우리가 있다.

2대천자 자리다.

천을(天乙)과 태을(太乙)도 쌍봉 형태다. 

정만인(鄭萬人)이 실존 인물인지는 차치하고 어쩌튼 그가 살만인(萬人) 이라면

돌부처는 구만인(萬人)인 듯하다.

안내판에는 아기를 갖고저 코를 떼어갔다고 적혀있지만 흥선 이하응의 숫한 살인 만행에

그 참담의 코눈물로 녹아 내린것은 아닐까? 

코가 온전했다면 이유없는 조선백성 1만인이 더 사라졌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끊긴 청룡방에서 돌부처는 중생을 위해 들어오는 살기를 온몸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육관선생의 현재의 묘자리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기실 그곳이 선생께서 살아생전

자신만이 알고있다고 주장해 온 자미원 명당 땅임이 분명하다고 추정해봤다.

다음은 선생께서 기자들과 인터뷰했다는 기사 일부들이다.

 

생전에 육관은......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미원 터 앞엔 못이 있지 북두칠성에서 내려온 천사가 이 못에서 목욕 재계하고

다시 천상을 향한다네.

용연이라 할 수 있지. 용들이 사는...

이 못 위에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남성의 힘찬 심벌같이 생겼다네.

 

육관도사는 생전에 대원군이 찾은 곳은 진짜 자미원(천자의 자리)이 아니라 했다. 가야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명당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육관도사가 죽은 후 그의 묏자리가 어디인지, 그곳이 진짜 명당인지 아닌지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랴. 자미원이 어디인들, 설사 손씨 천자가 나온다 한들, 진정 그것이 천기이고 음택의 일이라면, 세간이야 어찌해 볼 도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이다.

 

관의 유언 때문인지, 아니면 조용히 치르기 위한 가족들의 배려였는지 모르지만 일가친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새벽 3시에 발인했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장지에서의 하관절차도 아침 6시 무렵에 서둘러 마쳤다. 손씨의 장례는 이처럼 생전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쉬쉬”하며 치러졌던 것이다.

 

인터넷 셔핑자료지만 선생 생전의 흉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실이 선생의 묘소에 형기적으로 존재해 있음에

그 사실을 제시해 볼까한다.물론 학문적 분석인바 관련되신 분의 오해 없어으면 하는 바램도 전한다.

 

아래는 선생의 묘소 인근 지형도이다.

 

아래의 용맥도는 하단에서 설명하겠다.

 

육관도사는 생전에 대원군이 찾은 곳은 진짜 자미원(천자의 자리)이 아니라 했다. 가야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명당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빨간색 맥로가 정(正)룡 중출(中出)맥으로 B지점이 혈처다. 

육관선생의 위의 자신감은 지금은 자신의 묘소가 된 B지점에 대한 확신에서였다는 생각이다. 

사진에서처럼 위쪽에서 남연군묘 맥로와 분지하는데 남연군묘 쪽에는 호종하는 룡맥이 없다.

따라서 남연군묘 맥은 방룡일 뿐이다. 

현장에서는 언뜻 주황색 맥이 중출로 보이나 붉은색 정룡의 호종이다.

그러나 이곳 국세 주혈은 남연군 묘소다.

이유는 옥양봉 가야산을 병풍으로 삼고 천문광개(天門廣開)한 득수(得水)와 장풍취기(藏風聚氣)가 

남연군 묘소 앞 명당으로 다 모였다.

육관선생 묘소는 석문봉을 주산으로 하여 앞 봉우리를 현무로 저수지가 명당이 된다. 

따라서 룡의 수원협송(水源俠送)장단((長短)보더라도 육관 선생이 호언했던 것과는 반대로

혈의 역량 차이가 쉽게 비교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간룡에서 결작되고 백원래취()한 천시원이며 

설심부 重重包裏紅蓮辨 穴在花心 紛紛拱衛紫微垣 尊居帝座

에 부합되는 곳은 위성사진에서 보 듯 남연군 묘소다.

 

 

 

자미원 터 앞엔 못이 있지 북두칠성에서 내려온 천사가 이 못에서 목욕 재계하고 다시 천상을 향한다네.

용연이라 할 수 있지. 용들이 사는...

이 못 위에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남성의 힘찬 심벌같이 생겼다네.

위의 말 출처가 연구 대상이다 라는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선생은 당나라 양태진 지사 전문을 가지고 있었는 듯 하다.

내가 찾은 자미원이 위의 글 내용과 일치한다.

그리고 지금의 선생묘소 자리는 윗 글 내용과 형기적 모습이 유사한바 이는 선생께서 직접 소점하셨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따라서 선생은 김우중 모친 묘소도 위 내용을 근거로 태안 인평 저수지 근처를 찾다 현재의 자리에 소점하신 듯 하다는 생각이다.물론 그곳은 윗글 내용과는 관련조차 없어 보이지만 선생께서 자미원이라 했다면

그 뜻을 조금이라도 용인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지못해 그나마라도 빌미를 제공해 주고자 한 것일 뿐

그곳에는 자미원이라는 물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많은이가 그곳을 자미원이라 칭하는게 참으로 미스테리하다.  

  

육관 선생의 묘소이다.

안산이 없어 C지점을 안으로 한 듯하며 공망에 묶여있다. 

 

 

위 사진은 아래 설명의 당심혈 형태다.

외곽으로 지각같은 선익이 잘 발달되어있다. 

공원이라는 특수성도 있어겠지만 인장묘발의 자리로 판단해서 3시에 발인해서 6시에 마쳤다는게

아래 당심혈 하단 글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은 아닐런지? 

 

-육관의 유언 때문인지, 아니면 조용히 치르기 위한 가족들의 배려였는지 모르지만 일가친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새벽 3시에 발인했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장지에서의 하관절차도 아침 6시 무렵에 서둘러 마쳤다.

손씨의 장례는 이처럼 생전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쉬쉬”하며 치러졌던 것이다.-

 

 

 

따라서 선생께서 헬기타고 소점했다는 김우중 모친묘는 자미원으로 끼어들 틈이 당연 없다.

본인의 간산 결과도 이곳은  묘자리 잘못쓰면 집안 박살난다는 풍수지리가 정말 존재하는구나 하는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교육장소이다 라고 하고싶을 정도였으며

불행하게도 자미원 명당 만큼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래 지도의 빨간점은 백운-백계산 옥룡사이다.

비보의 큰 뜻과 함께 도선풍수를 화룡점정([畵龍點睛)한 곳이다.

간룡이 대진(大盡)하고 산수가 대회(大會)하는 원국(垣局)의 광(廣)을 이룬 곳으로 실로 놀랍다.

혹여 도선국사에 대해 자구난하(藉口 下)듯 해온 무리들이 있다면 무언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믿는다. 

방정지원한 국세가 좌우로 나눠어져있는 태미원이지만 몇몇의 아쉬움과 

물이 횡성수요(橫城水繞) 듯 돌아 감싸지는 못했다.

가야산 남연군묘소 원래의 5층석탑처럼 이곳엔 도선국사의 옥룡사가 있다. 

기실 남연군 묘소로 없어진 5층석탑도 이곳처럼 비보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종국에 그 피해가 흥선대원군 이후에도 일제의 만행 그리고 그들의 국탈이 근거가 되어 

남북분단 후 숙청,6.25전쟁까지 합하면 살이백만은 족히 넘는다.

이곳 역시도 남연군 묘소처럼 결지한 용의 출신이 정룡 중출맥이 아닌 방룡이다.

국세의 중심이된 룡이 정(正)을 얻지못한 방룡은 대본(大本)을 감당치 못하고 줄기나 가지로

부생하게되는 명리에서 을목과 그 유사함이 많다.

대국세는 천하가 그 화를 함께 받는다.

옥룡선사께서 그 화를 부려 천년을 넘게 막아왔지 싶다. 

 

*논조의 일관성을 위하여 반어법을 쓰게되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위의 일부 사진자료는 설심부-신평역주도해-,종합정보카페광장,인자수지-김동규역저-,다음지도에서 발췌했습니다.

                                          많은 도움에 감사드림니다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김성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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