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원과 변곡점(변환점)<2>
한반도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던 선인들의 생활 방식 측면에서 볼 때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가르는 확연한 차이점이라면
-청동이라는 금속을 사용하였다는 것과
-집단으로 한곳에 정착하며 본격적인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청동이라는 금속을 사용하고 정착 생활을 하였던 청동기시대 유적을 답사하여 보면,
사람과 상생의 地氣가 흐르는 명당의 지역을 벗어난 곳이 한군데도 없을 만큼 生氣脈을 정확히 식별하여 활용하였다.
그런데 유적들이 놓인 위치나 地氣를 활용한 측면으로 보아 生氣脈의 핵심지(중심축)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더기로 조성된 고인돌 군락지인데, 고인돌을 조성하기 알맞은 빈 공간을 남겨
두고 만들기 힘든 경사진 산위에 놓인 고인들도 많다. 바로 殺氣脈이 흐르는 곳을
피하고 생기맥이 흐르는 명당에 만들었다.
청동기시대부터
-땅에는 사람과 상생인 生氣가 흐르는 곳과 상극인 殺氣가 흐르는 곳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정확히 식별하여 사람에게 유익하게 활용하여 왔으며
-지속적으로 전수되고, 발전되었음은 그 이후에 보이는 유적에서도 알 수 있는데
-신라인들이 가장 먼저 生氣脈의 핵심지(중심축)를 식별하고 활용하였다.
백제의 경우
-生氣脈은 정확히 식별하여 양택과 음택를 조성하였으나,
-生氣脈의 핵심지(중심축)를 찾아 활용한 것은 부여에 도읍을 정한 후의 유적에서 나타난다.
부여 능안골 고분군으로 고인돌은 지상을 돌로 만들었다면 이곳은 흙으로 봉분을
만든 것으로 生氣脈이 흐르는 명당지역에 고인돌 군락지와 같이 조성되었다.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생기맥이 흐르는 곳에 모든 고분이 조성되었으나 핵심지는
식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가야 고분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신라의 경우
신라는 초기 유적부터 生氣脈의 핵심지를 정확히 식별하여 활용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풍수지리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것은 신라인들이었다고 언급한 것이다.
한반도 변방의 조그마한 나라로 시작한 신라가(초기에는 가야보다 훨씬 작은 약소국이었음)
삼국을 통일하고,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단일 왕조로 천년 왕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요인들도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땅에 흐르는 상생의 地氣와 상극의 地氣는 물론 그 핵심지(중심축)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경주 서악동 고분, 태종무열왕릉 위에 있는 4기의 고분으로 生氣脈의 핵심지에
정확히 자리 잡았다.
이처럼 훌륭한 신라의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중엽까지 잘 전수되다가,
-후기에 가면서 地氣식별 방법이 흔들리기 시작하여 완전히 무너지고,
-사람과 相克의 기운이 흐르는 殺氣脈(상극기맥)에 음택을 정하면서 결국 천년왕국 신라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生氣가 흐르는 땅이 아닌 상극의 기운이 흐르는 땅(殺氣脈, 상극기맥)을 명당으로 잡기 시작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부터는 궁궐, 왕의 능 등 중요한 양택과 음택이 모두 相克의 땅(殺氣脈, 상극기맥)에 놓이게 된다.
통일신라 이후 흉지를 명당으로 잡는 잘못된 풍수지리가 점차 세를 얻어 오늘날에는 절대 주류의 풍수지리가 되고, 거의
모든 풍수사들은 그러한 풍수지리를 전수받고 익혀 실행하고 있는 실정이 너무 안타깝다.
통일신라 말기 이후 우리나라 풍수지리에서 보이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땅에 흐르는 상생의 地氣와 상극의 地氣 중 부드럽고 은은한 相生의 地氣(生氣脈)는 잊혀지고,
-상대적으로 강렬하여 식별이 용이한 상극의 기운인 殺氣脈(상극기맥)만 식별하게 되었으며,
-상극의 기운이지만 땅에서 유일하게 식별할 수 있는 상극의 地氣(殺氣脈)가 흐르는 곳을 명당이라고 잡게 되었다고 하겠다.
즉 땅에서 기운을 느끼니까 그것을 명당의 기운이 흐르는 穴이라고 본 것인데, 이것은 명당의 기운이 아니고 사람과
상극의 地氣로 흉지일 뿐이다.
또한, 흉지(상극의 지기)를 이른바 명당으로 잡는 풍수지리가 전수되어 행해지다 보니,
-부자 3대 못가는 풍수지리가 되어
-풍수사들이 전수받고 익힌 대로 터득하여 명당이라고 잡아주어도 오히려 관련된 사람들이 망하거나 몰락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현상이 지속되자
-과거에 알려진 명당이나 고분 등을 답사하고 살펴보면서 그 자리에서 땅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으니까
-세월이 흘러 地氣가 쇠하였다거나, 地氣가 바뀌었다거나, 휴식기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그 자리의 지형이나 지리적인 여건, 산세 등 외형적인 모습에서 명당의 요건을 찾으려 하였을 듯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이른바 형기론이나 이기론, 물형론과 같은 형식이론에 치중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풍수와 관련하여 전설의 고향과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만들어 내고
-자연을 사람에게 유익하게 활용하려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풍수지리는 사라지고
-도선비기를 시작으로 신비로움과 정치적 술수, 혹세무민하는 이야기 등으로 포장된 비기로 전락하였다고 하겠다.
안타깝게도 신라의 그토록 훌륭한 地氣식별 방법이 왜, 무엇 때문에 무너졌고,
왜, 사람과 상극의 地氣인 흉지를 명당으로 잡는 엉터리 풍수지리가 전수되고 번창하여 현재까지도 그러한
풍수지리가 절대 주류로 자리 잡고 있을까?
왜, 무엇 때문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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