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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원과 변곡점(변환점)<1>

범산 2009. 10. 8. 18:00

본 카페의 松峴회장님을 통하여

풍수지리의 근간이 地氣식별이라는 것과 음택과 양택이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회장님을 모시고 

현대의 음택과 양택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고려시대, 통일신라기, 삼국시대, 가야, 마한 청동기시대를 거쳐 석기시대

유적지까지 답사 여정은 시간적, 경제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또한 답사지를 선정하고 찾는 데에도 답사하는 만큼의 열정과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고창 고인돌. 2,0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전북 고창군 상갑리, 죽림리, 매산리, 송암리에 분포하여 있다.

 

 많은 제약과 어려움 속에서도 10 여년이 넘게 이러한 여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아직도 계속되는 여정이지만) 그동안

들어 왔던 막연한 풍수지리와는 달리 

-양택도 그렇지만 선대 음택이 그 후손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은 엄청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어지는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현대에서 시작한 여정이 결국 한반도의 초기 유적지인

석기시대 유적지까지 가게 되었다.(관련 글 참조)

 

이러한 여정을 통하여

-한 시대의 유적지를 살펴보고 나면, 그 앞의 시대는 어떠하였을까?

-地氣는 누가 처음 식별 하였을까?

-地氣를 어떠한 방법으로 식별하였을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왜 현대에는 흉지를 명당으로 잡는 풍수지리가 전수되었을까? 등등..

답사를 할수록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풀기도 하였고,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한반도에 거주하였던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보니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두번의 중대한 변환점(변곡점)을

볼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처음 地氣를 정확히 식별하고 활용한 것은 청동기 시대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통일신라 말기에  地氣식별 방법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고인돌은 독립된 곳에 한기 또는 몇기씩 그리고 어느 곳은 수십기가 무더기로

                      조성되어 있다. 얼핏 보면 무작위로 적당한 곳에 놓인 것같으나, 모든 고인돌은

                      모두 生氣脈이 흐르는 대명당급(명당 4급지) 이상의 地氣에 조성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의 地氣식별에 대해 언급하자면[세계적으로 한반도의 남부 지방에 청동기 거석 유적(고인돌)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수렵, 어로, 채취 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 유적지에서는 전혀 地氣를 식별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소규모 농경이 시작되며 어느 정도 정착을 하였던 신석기 시대를 거쳐

-본격적인 농경, 정착사회로 들어선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모두 生氣脈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는 정확히 地氣를 식별하였는데,

-아직 生氣脈의 핵심지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후 地氣 식별 방법이 점차 향상되어 신라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변방의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인류 역사상 유일한 천년왕국(단일왕조로서 유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의 탁월한 풍수지리(地氣식별 능력과 정확한 활용)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문 북방식 고인돌(탁자식)도 있다. 남방식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토록 훌륭하던 신라의 풍수지리(地氣식별 방법)가 통일신라 말기에 무너지면서(대표적인 유적은 경애왕릉과 배리 3릉 중

 가장 위에 있는 능), 천년왕국 신라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통일신라 말기 이후 양택이나 음택을 정할 때 

-生氣脈(상생기맥)이 흐르는 명당의 地氣 식별방법은 잊혀져가고

-殺氣脈(상극기맥)이 흐르는 흉지를 명당으로 잡게 되어

-오늘날에는 잘못된 풍수지리가 절대 주류가 되었다.

 처음 경주로 답사를 가서 초기 유적부터 보면서 그토록 감탄하였던, 그래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감탄하였던 정확한 地氣식별과 활용 방법이었는데...!

왜 그렇게 무너졌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후 많은 답사와 문헌자료 등을 찾아보며 나름대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탁월하였던 신라의 풍수지리가 무너지는 것에 대하여는 다음 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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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풍수지리( cafe.daum.net/songhyunpoong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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