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아랬말
정계순(鄭啓淳) : 1729년(영조 5) ∼ 1789년(정조 13)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옥여(沃汝)이며, 유학 정석증(鄭錫曾)의 아들이다. 1765년(영조 41) 식년 진사시에 3등 75위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그 다음해에 음직(蔭職)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어 중부직장(中部直長)·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선공봉사(繕工奉事)·전생직장(典牲直長)을 역임하였다. 이 벼슬은 모두 집안 어른들의 상을 당하여 서용(敍用)된 것이며 간혹 바꾸어 임명하거나 서열에 따라 직위를 옮긴 것이다. 1776년(정조 즉위)에는 반궁(泮宮)에서 감제(柑製)를 설행하여 진사(進士) 정계순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보게 하였다. 이후 1777년(정조 1)에 문과에 응시하여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는데, 송(頌)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계(資階)가 다하여 통정대부(通正大夫)로 승진하여 풍천(豊川)·청송(靑松)·초산(楚山) 등 3부의 부사로 임명되었다가 내직인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들어와 예·병·공 3조의 참의(參議),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사간원(司諫院) 등을 역임하고 1785년(정조 9) 정월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그는 수시로 사람들에게 베풀었으며 관리가 하는 일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를 믿었다. 관리 시절 그는 흉년을 만나면 상급 관청에 진곡(賑穀)의 대출(貸出)을 의논하여 곡물 4천석을 대출하였다. 이것은 곡물이 귀할 때 대출하고 곡물이 넉넉할 때 거둬들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한결같이 낮은 가격으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중대한 죄안(罪案)을 다룰 때 생사가 달려 있으면 사람 인자(人字) 한 글자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인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로 현감(縣監) 류성모(柳聖模)의 딸이다. 그는 아들 셋을 두었다. 첫째 아들 정동만(鄭東萬)은 도정(都正)을 지내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둘째 아들 정동면(鄭東勉)은 부사를, 셋째 아들 정동일(鄭東逸)은 사서(司書)를 지냈다. 그의 묘는 하남시 교산동에 있는데 그 옆에 1834년(순조 34) 이상황이 찬한 신도비가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鄭啓淳神道碑』 ; 『司馬榜目』
풍취라대(風吹羅帶)의 형국이며 와(窩)혈로 보기드문 형태의 혈
풍취라대 ; 바람에 휘날리는 여자의 옷고름(좌청룡, 우백호)이 길게 늘어지고 있으며 옷고름 매듭부분에 혈이
있음. 와(窩) 혈의 충족 조건은 육지가 있어야 하나 가늠하기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