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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잉어를 먹지 않는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 음택지를 다녀오며..

범산 2008. 12. 9. 20:46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음택지를 다녀오며


얼마전 TV프로그램 ‘스펀지’에서 파평윤씨와 잉어설화에 관련된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었죠.. “가수 윤도현은 네모를 먹으면 아버지께 혼난다” 라는 명제로...


파평윤씨들이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한국자연풍수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파평윤씨 시조와 관련한 잉어 설화는 여러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내용은 거의 엇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의 파평산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 연못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서리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몰아 쳤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자, 사흘째 되는 날 부터, 다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곳에서 빨래를 하던 윤씨란 성을 가진 할머니가 문득 연못 한 가운데를 바라보자 금빛으로 장식된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금궤를 건져 열어 보니 찬란한 금빛 광채와 함께 아기가 누워 있었다.

금궤 속의 아기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아기를 거두어 기르면서 그 할머니의 성을 따서 아기의 성을 윤씨로 정하였는데, 그 아기가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윤신달의 고손자(高孫子)인 문숙공 윤관(尹瓘)장군의 일대기에도 잉어와 관련한 설화가 나온다.

윤관 장군이 함흥에 있던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자, 수많은 잉어 떼가 몰려 들어 잉어떼를 다리로 삼아 무사히 강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적병들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다리로 삼았던  잉어떼는 어느 틈엔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윤씨들은 선조에게 은혜를 베푼 잉어에게 보은하고자 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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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29일 파평윤씨 시조인 윤신달의 묘소에 관산을 다녀 왔습니다..대구한의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 최고지도자과정반과 함께 말입니다..


윤신달의 묘소는 사진에 보이는 봉좌산鳳座山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죠.. 산정상부에 봉황의 머리를 닮은 특이한 형상의 암봉이 있다하여 봉좌산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마을입구에서 시야에 들어온 봉좌산은 정상부의 삼각형 형상의 봉좌암과 함께 두 갈래의 기운찬 멋진 용맥을 아래로 기복굴곡起伏屈曲하며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답사당일 시정이 나빠 이미지가 좋지 않네요.. 실제는 상당히 좋은 용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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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시조묘는 봉강재(鳳岡齋,경상북도 문화재 201호)란 재실을 거쳐야 올라 갈 수 있는데 이 봉강재는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의 음택을 관리하기 위해 1752년(영조28)에 세운 재실건물로 처음엔 봉황이 사는 암자란 뜻의 봉서암(鳳棲菴)으로 현판을 내걸고 스님을 상주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수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두루 갖추었는데 봉강재 대문을 넘어 마당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풍루암(風樓庵),봉강재(鳳岡齋),봉서암(鳳棲菴),태사공분암(太師公墳庵) 등의 현판을 처마 아래에 달고 있는 고색창연한 건물이 객을 품위 있게 맞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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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분암이란 현판은 아래글을 읽어보시면 이해가 되실 듯합니다..


이곳에 잠든 태사공 윤신달 묘소와 관련하여 문중에서 전하는 설(說)은 이렇다. 공(公)은 신라의 천년사직이 기우는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인 91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도와 궁예(弓裔)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으며,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討滅)하여 후삼국을 통합하여 개국(開國) 2등 공신인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敍勳)과 태사(太師) 삼중대광(三中大匡)의 관직을 하사 받는다. 그러다가 얼마 후 태조 왕건이 죽고, 944년에 혜종(惠宗)이 즉위하였는데, 혜종은 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신라를 다스리는 경주대도독(慶州大都督)으로 내보내고, 공의 아들 윤선지(尹先之)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봉직(奉職)케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혈육별리(血肉別離)의 고통을 겪는다. 공은 경주에서 30년 재임 중에 한 번의 변란도 없이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973년(광종 24)에 81세로 경주에서 숨을 거두니 유민(遺民)들이 그의 덕(德)을 흠모(欽慕)하여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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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인 봉강재 영역에서 묘역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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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입석들은  파평윤씨 시조묘 참배를 기념하는 기념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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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석들을 지나 묘역으로 올라가는 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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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는 꽃나무와 향나무 너머로 조그만 연못이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아무런 이유없이 조성해둔 연못은 아니겠죠.. 섣부르게 판단하기 보다는 먼저 묘소를 찾아 본 뒤에 이 조그만 연못의 존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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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서 뒤돌아 본 봉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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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에서 금계포란金鷄抱卵형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봉강재의 형국입니다..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란 뜻지요..  사방팔방이 산과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 등으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그러해 보이나요??  봉강재 마당에는 인공으로 조성한 둥근형태의 조그만 소나무 정원이 하나 있더군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둥근형태의 산으로 보이는데...  금계의 알자리를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봉황이 깃들고,, 금계가 알을 품는다..’ 그래서 대나무를 많이 심고 알자리를 조성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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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太師尹公莘達之墓(고려태사윤공신달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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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서 바라본 봉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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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달의 음택은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놓여 있는데 이는 정동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죠..  금일 관산을 동행하신 대구한의대 풍수지리학과 류재백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유좌로 놓여 있는 윤신달 묘의 좌향은 풍수이론의 이기론과 형기론에 의하면 다소 의문이 가는 좌향으로 볼 수 있으며 풍수이론에 좀 더 적합한 좌향을 찾아본다면 신좌申坐 정도가 좋겠다는 의견이셨습니다..  묘소 뒤의 입수룡入首龍이 申龍이고 진명당水는 좌청룡쪽에 있으니 坐를 신좌로 놓아야 용이 자신의 명당수를 마실 수 있고, 동시에 안정적이고 보기 좋은 일자문성의 청룡자락을 안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좋겠다는 말씀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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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달 묘소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외백호 역할을 하는 봉좌산의 또 다른 용맥입니다.. 날이 흐려 시야가 좋지 않군요..  저 용맥 아래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전두환정권 시절 허00씨를 배출한 마을이라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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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달 묘소 뒤로 용맥을 따라 올라 갑니다..  묘소 뒤쪽에 좋은 혈자리가 또  하나 더 있다는 류재백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들 용맥을 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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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이 영천지역에서 운주산을 만들고 운주산의 龍脈이 이곳 봉좌산을 향해 내달리다 작은 용맥을 하나 아래로 내려보내는데 바로 이 용맥의 용진처龍盡處에 윤신달의 음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죠..  용맥을 따라 2-3분 정도 올라가니 과연 용진혈적한 혈처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용맥이 어느 지점에서 좁아졌다가(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氣를 묶어주는 곳) 다시 넓게 벌리니... 혈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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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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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록하게 쏟아오른 유혈乳穴형의 혈인데 용의 기운이 특정 지점에 맺혀 있는 진혈처로 보이는 곳입니다.. 땅을 약간 파고 흙을 살펴보니.. 거의 비석비토非石非土에 가까운 밝은 빛을 띤 좋은 흙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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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좌묘향(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향)으로 놓여 있는 윤신달 음택의 안산입니다.. 우측에서 내려온 내백호자락이 앞을 둘러싸 안산을 취한 형국인데 다소 짧고 기울어져 보여 안정감이 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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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인향(남서를 등지고 북동을 바라보는 향)으로 좌향을 놓고 바라 본 안산입니다..  역시 좌측에서 내려온 내청룡자락이 길게 음택의 전면부를 감싸 안는 형국인데 일자문성一字文星으로 길게 내려 뻗어 안정감이 있어 보이네요.. 


안산 안쪽으로 재실인 봉강재 영역이 보입니다.. 좌청룡,우백호 자락이 겹으로 감싸안는 안쪽에 들어 앉아 있죠..  봉강재 뒤쪽이 청룡,백호자락의 사이로 명당수가 빠져나가는 파구지점이 됩니다..  파구지점이 휑하니 열여 있지 않고 청룡,백호,봉강재,소나무,대나무 등으로 잘 닫혀 있어 명당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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巳방위(남남동)로 보여지는 탐랑목성체의 잘 생긴 문필봉입니다... 酉坐에 巳방위로 나타나는 잘 생긴  문필봉이라... 관운,벼슬을 의미하는 官峰이 되는군요.. 주변엔 또 따른 잘 생긴 필봉들이 더 보입니다.. (관산 당일 날이 흐리고 시정이 나빠 멀리 있는 산들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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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제를 모시는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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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을 마치고 봉강재로 내려오는 길에 갑작스런 폭우를 만났습니다.. 엄청난 파워를 지닌 벼락, 돌풍, 폭우 ....   20여분 정도 꼼짝을 못하고 봉강재 문간채 툇마루 그리고 누마루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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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재를 관리하시는 선생님께서도 이런 벼락은 정말 무시무시하다시며 누마루 아래에서 우리 일행들과 함께 피난을 하셨습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서울에서는 북한산 용혈봉에 벼락이 떨어져 다수의 등산객들이 사망하고 다치는 참사가 있었더군요....  용혈봉이라....  龍穴峰이라....


풍수학인의 입장에서는 용혈봉에 떨어진 벼락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기가 타고 흐르는 용맥 상의 혈자리 지점이라 이름 붙여진 용혈봉...  풍수이론에서 말하는 용맥 상의 생기의 흐름과 그 생기가 갈무리 되어지는 지점인 혈자리의 화강암봉... 그래서 용혈봉이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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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계속 내리고....  그렇게 무덥던 날씨가 순식간에 추워지더라구요...


대구로 돌아나오는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봅니다..


‘ 왜?? 윤신달 묘소는 풍수이론에 잘 부합되는 신좌인향으로 놓지 않고 유좌묘향으로 놓았을까??? 왜지??? ’


이윤기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늘 이런 질문을 독자들을 향해 던지고 있죠.. 


‘신화는 상상력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접근을 하시오’ 라고 말입니다..


상상력....



‘음..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좀더 윤신달의 묘를 깊이 있게 연구해 보아야할 필요를 느낀다... 다만 先연구자들의 의견(현재의 유좌묘향보다는 신좌인향이 풍수이론에 잘 부합한다)을 존중해서 이 문제에 접근을 해 본다면 솔직히 뾰족한 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 전인 고려 광종조 973년에 이 자리에 묻혔다는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은 이후 750여년의 시간동안 음택을 망실한 상태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다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인 1737년(영조13)에 경상감사로 부임한 후손 윤양래에 의해 바로 이 지역에서 훼손된 묘비를 찾게 되어 봉분을 쌓고 석물을 놓았다고 한다...


봉황의 머리가 놓여 있는 봉좌산 자락에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국의 터에 마련된 윤신달의 천년유택이다...  형기론,이기론이라는 풍수상의 이론도 물론 중요했겠지만,, 유좌,,,또는 신좌에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조심스럽지만 유좌로 놓았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12지지 중 酉가 상징하는 12지신이 무엇인가??


바로 닭이다...  지렁이가 묵어 뱀이 되고 뱀이 묵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묵어 용이 되듯..  닭이 금닭이 되고 금닭이 봉황이 되고.......


봉좌산(봉황이 앉아 있는 산), 봉강재(봉황이 깃든 산등성이의 집),봉서암(봉황이 깃든 암자),금계포란(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곳)


윤신달의 묘역은 이렇듯... 봉황,닭관 관련된 전설이 얽혀 있는 땅이다..


그렇다면,,


봉황과 닭의 전설이 녹아 있는 이 터 중에서도 氣가 가장 잘 갈무리되어 맺혀 진혈을 이룬 윤신달의 음택지는 누가 뭐래도 봉황의 깃듦에 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룡입수맥이지만 신좌,유좌가 큰 차이가 없다면 다분히 좌향을 닭을 상징하는 유좌로 놓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짧은 생각이지만,,


그래서,,, 유좌로 놓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옛 시조의 탄생설화에 근거해 무려 1,00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파평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 21세기 첨단 정보통신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문중과 가문을 통해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우리네 家風정신입니다.. 


바로 한국의 멋스러움 말입니다...



좋은 인연 지으세요...



풍경... 두손모음...



 


 


출처 :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글쓴이 : 풍경 송은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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